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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3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이웅평 편을 방영하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검색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조명 기사는 보상금과 결혼 생활 같은 인간적 일화에 집중할 뿐, 정작 1983년 2월 25일 그날 무슨 일이 정확히 몇 시에 벌어졌는지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 글은 귀순 당일의 분 단위 타임라인부터 이후 20년의 삶, 그리고 그가 몰고 온 미그-19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까지 시간 순서로 정리했다.
이웅평은 누구인가 — 귀순 전 이력 (1954~1983년 2월)



이웅평은 1954년 9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청계리에서
평양시 사회안전부 소좌였던 아버지 밑에서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진의 김책공군대학교에 입교해 1975년 6월 1일 공군소위로 임관했고,
이후 조선인민군 공군 1비행사단 책임비행사로 복무했다.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하는 동안 남한 방송을 몰래 청취하며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키워갔다고 전해진다.
1983년 2월 25일, 귀순 당일 타임라인
이날은 로켓 사격 훈련이 예정된 평범한 훈련일이었다.
아래는 언론 보도와 위키 자료를 종합해 재구성한 시간대별 흐름이다.
| 오전 10:30 |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에서 미그-19 편대(2대) 이륙 |
| 이륙 직후 | 이웅평이 편대를 이탈해 기수를 남쪽으로 전환 |
| ~10:45 | 고도 50~100m, 시속 약 920km로 저공 남하하며 황해남도 해주 상공 통과 |
| 10:45 무렵 | 연평도 상공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통과 |
| 10:58 | 민방위본부가 서울·인천·경기 전역에 공습 경계경보 발령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
| 경보 직후 | 팀스피리트 훈련 중이던 공군 F-5 전투기 요격 출동, 미그기가 날개를 흔들어 귀순 의사 표시 |
| 11:04 | F-5의 유도에 따라 수원 공군기지 착륙, 귀순 완료 |
이날 전국이 실제 북한의 공습으로 오인해
잠시 혼란에 빠졌을 정도로 파장이 컸다는 점이,
단순한 '탈북 사건'을 넘어 국가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귀순의 결정적 계기 — 라면 봉지 하나가 바꾼 생각



이웅평이 직접 밝힌 귀순 계기 중 하나는 뜻
밖에도 라면 봉지였다.
함경북도 경흥군 해변에서 우연히 주운 남한산 라면 봉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라면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이 짧은 문구에서 남한 사회의 소비자 신뢰 시스템을 읽어냈고,
그동안 교육받아온 남한에 대한 인식과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1976년 소련 미그-25기의 일본 귀순,
1982년 중공 미그-19기의 대만 망명 등 앞선 사례들도 그의 결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순 이후 타임라인 — 보상금부터 사망까지 (1983~2002)



| 1983년 | 고급 아파트 78채 값에 해당하는 보상금 15억 6천만 원 수령 |
| 1984년 | 박선영씨와 결혼, 안전을 이유로 공군 관사에 신혼집 마련 |
| 1985년 5월 | 북한 근무 경력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임관 |
| 1987년 | 중령 진급 |
| 1989년 | 공군본부 정보참모부 근무 |
| 1990년 | 공군대학에서 강의 시작 |
| 1996년 | 대령 진급 — 귀순 조종사로는 최초 |
| 2002년 5월 4일 | 간 질환으로 투병 중 간이식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만 47세로 별세 |
| 2002년 5월 9일 |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 안장 |
귀순 직후 그는 '반공 아이돌'로 불릴 만큼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복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연간 900회가 넘는 강연·행사에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연간 공식 일정(약 600회)보다 많은 수치였고,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한 환영 행사에는 150만 명이 몰렸다고 전해진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사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026년 9월 방영된 '꼬꼬무'에서
아내 박선영씨는 신혼집이었던 공군 관사에서 국가기관이 설치한 도청장치를 발견했고,
이에 항의하며 이혼을 선언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웅평은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평생 한 푼도 쓰지 않았는데,
훗날 통일이 되면 자신의 귀순으로 고통받았을 북한의 가족들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웅평이 남긴 것 — 미그-19의 행방과 이후 귀순 조종사 비교
그가 몰고 온 미그-19는 북한에 반환되지 않고
한국 공군의 전술 연구에 활용됐으며,
현재는 서울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그기를 몰고 온 조종사 귀순은 이웅평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아래는 대표적인 세 사례를 비교한 표다.
| 노금석 | 1953.9.21 | MiG-15 | 김포기지 | 미군에 기체·본인 인도, 포상금 10만 달러, 미국 이주 후 켄네스 로우(Kenneth Rowe)로 개명 |
| 이웅평 | 1983.2.25 | MiG-19 | 수원기지 | 보상금 15.6억 원, 한국 공군 복무(대령까지 진급) |
| 이철수 | 1996.5.23 | MiG-19 | 수원기지 | 정착금 4.8억 원, 한국 공군 복무(2010년 대령 진급, 귀순 조종사로는 두 번째) |
이웅평과 이철수 모두 수원기지에 착륙했고
한국 공군에서 대령까지 진급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보상금 규모는 13년 사이 4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이는 냉전이 한창이던 1983년과, 남북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된 1996년의 정치적 무게가 달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웅평은 왜 귀순했나요?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이 쌓이던 중,
해변에서 주운 남한 라면 봉지의 제품 교환 문구를 보고 남한 사회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 결정적 계기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에 앞선 다른 국가 조종사들의 귀순·망명 사례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Q. 이웅평이 받은 보상금은 얼마였나요?
당시 고급 아파트 78채 값에 해당하는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 그는 이 돈을 평생 쓰지 않고 남겨뒀다고 전해진다.
Q. 이웅평이 타고 온 미그-19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북한에 반환되지 않고 한국 공군의 전술 연구에 활용됐으며, 현재 서울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Q. 이웅평은 언제, 어떻게 사망했나요?
2002년 5월 4일, 간 질환 투병 중 간이식 수술 후유증으로 만 47세에 별세했다. 이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Q. 이웅평 외에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조종사가 또 있나요?
1953년 노금석(미그-15), 1996년 이철수(미그-19) 등이 있다. 이철수는 이웅평에 이어 두 번째로 대령까지 진급한 귀순 조종사다.
Q. 이웅평 귀순 당시 왜 서울에 공습경보가 울렸나요?
정체불명의 북한 전투기가 저공으로 NLL을 넘어 남하하자, 민방위본부가 실제 공습 상황으로 판단해 서울·인천·경기 전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했기 때문이다. 이후 F-5기가 요격에 나섰다가 미그기가 귀순 의사를 밝히면서 상황이 종료됐다.